어렸을 때, 그러니까 다음 카페 공지에 올라온 스케쥴표를 보고 그에 맞춰 티비를 틀면서 엑스맨 같은 예능 프로그램을 챙겨보고 컴백 시기에 맞춰 시내 혹은 대형 마트 안의 작은 씨디 판매대에서 앨범을 사던 그 시절의 나는 늘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엄마 아빠의 눈치를 보며 씨디나 굿즈를 대신 결제해달라고 쭈뼛거리지 않을 수 있는 그런 어른.
어른이 되고 싶다는 말은 때론 스무살이 되면 집을 떠나 서울로 가고 싶다는 말과도 의미가 통했다. 고속버스 막차 시간을 고려하지 않고 불 꺼진 콘서트장을 서성이며 내가 본 빛나는 것들에 대해 곱씹을 수 있는 여유와 어른의 동행 없이 오로지 나 혼자, 혹은 뜻이 맞는 친구와 함께 공연장에 찾아갈 수 있는 자유가 간절할 때마다 서울로 가고 싶었다.
그리고 어른이 되고 독립하여 서울에 혼자 살고 있는 지금. 나는 엄마 아빠 대신 통장 잔고의 눈치를 살피고 월급날까지 남은 날을 계산하며 굿즈를 산다. 물론 거의 대부분은 사정이 여의치 않아 포기한다. 콘서트가 열리면 어디든 지하철 혹은 버스로 한 시간 만에 갈 수 있지만 티켓팅에서 포도알을 구경조차 못해 번번이 좌절한다. 최근에는 논문 때문에 바빠지기까지 해 덕질 친구를 만날 마음의 여유조차 없다. 십여년이 넘는 시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내 사랑에는 장애물이 많다.
그러나 사람이 죽으라는 법은 없고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듯 예상치 못하게 일이 술술 풀리는 순간은 찾아오기 마련이다. 이번 덕질에 숨통을 틔워준 것은 우리 지도교수님이다. 종종 지나가는 말로 "관심 있는 학생들이 지원했으면 좋겠다"고 하셨던 과제 명단에 내 이름을 올려주신 것이다. 물론 과제 명단에 이름이 오른 만큼 일을 해야하긴 하지만, 어찌됐든 꽤 적지 않은 인건비가 추가로 들어왔다. 사랑하고 싶은 사람을 발견함과 동시에 거짓말처럼 들어오는 돈. 이 순간 나는 이 사랑에 감히 운명이라는 이름을 붙이고야 만다. 그 결과 요즘 "사랑? 돈으로 사겠어" 하던 가을동화 속 원빈처럼 돈을 쓴다. 매일 매일 서로 다른 모습의 정우가 우리집을 찾아온다. 때로는 인형으로, 때로는 한 장의 종이카드 속에서 웃고 놀라고 윙크하는 얼굴로.

가장 먼저 우리집을 찾아온 것은 정아지라는 이름의 인형. 무대 위 혹은 자컨 속에서 정우가 달릴 때마다 펄럭이는 직모가 꼭 강아지 귀 같다고 생각할 때가 많은데, 저 커다란 귀가 그런 정우를 닮은 것 같아 샀다. 다행히 인형이 배송된 지 얼마 안 돼 양도 매물이 많아 쉽게 구할 수 있었다.


그 다음에 산 것은 역시 포토카드. 탑로더에 예쁜 포토카드를 넣고 예절샷을 찍는 것에 중독된 뒤부터 포카를 모으기 시작했다. 모든 아이돌에게는 소위 '반포자이' 혹은 '트리마제' 라고 불리는 포카가 있는 법. 정우의 경우에는 핫정 (핫도그 정우라는 뜻)과 놀정 (놀라는 정우라는 뜻) 포카가 그랬다. 내 눈에도 예쁘지만 남의 눈에도 예쁜 포카. 그냥 넘어갈 수 없지. 다른 포카들과 합쳐 합리적인 가격에 구매했다. 양도해주시는 분이 포장에 적은 글귀가 너무 웃기고 또 귀여워서 한참을 웃었다.


그러나 '핫정'과 '놀정'보다 좋아하는 포카는 바로 베이커리하우스 콜라보 트레카 중 하나인 브이 셀포. 사실 이 시리즈도 브이 셀포보다는 쉿 정우가 좀 더 유명하고 매물도 많다. 하지만 내 눈엔 브이하는 정우가 훨씬 예쁜걸. 팬들에게 예쁘게 보이려고 야무지게 낀 파란 서클렌즈도 귀엽고, 또 이전까지는 미처 인지하지 못했던 정우 눈 밑의 작은 점이 잘 보이는 것도 좋다. 누군가 나에게 정우를 왜 혹은 어쩌다 좋아하게 됐냐고 묻는다면 이 포카를 내밀며 이렇게 예쁜데 사랑하지 않을 수 있냐고 되묻고 싶을 정도로.
브이 정우의 옆에 있는 두 포카는 이번 산리오 콜라보 포토카드들. 애석하게도 나는 NCTX산리오 콜라보가 거의 끝난 뒤 입덕했다. 그래서 역시 산리오 콜라보 포카도 양도를 받아야했다. 사실 여전히 산리오 콜라보가 어떤 식으로 진행되었는지, 어떤 포카들이 있는지 다 이해하지 못한 상황에서 일단 사고 봤다. 비이성적 소비라는 것을 알지만 어쩌겠어요. 우리 정우는 짱강아지 포챠코인데. 정우의 콜라보 캐릭터가 포챠코라는 것만으로 이 포카는 살 만한 가치가 있다.

그리고 드디어 문제의 인형을 소개할 시간이 왔다. 이 인형의 이름은 김복칠. 앞니 두 톨과 동그란 눈이 정우를 똑 닮은 인형. 정우 인형 목록에서 복칠이를 보자마자 이건 사야 된다는 느낌이 왔다. 그러나 찾아보니 재고판매는 이미 오래 전에 끝나있었고, 양도하겠다는 사람들은 너무 적었다. 그나마도 8월 초에 올라온 글이 마지막이었다. 너무 오래 전에 쓴 글이라 그런지 양도하겠다고 트윗을 올린 사람들조차 답장을 잘 주지 않았다. 늦은 입덕을 후회한 적은 한 번도 없는데, 복칠이를 데려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후회가 됐다. 그 뒤로는 며칠동안 트위터만 붙잡고 복칠이를 입양보내겠다는 사람을 찾았다. 반쯤 포기하는 마음으로 '거래 가능한가요?' 라고 보낸 DM에 처음으로 '네 가능합니다!'라는 답장을 받았을 때의 감동이란. 아무튼 기나긴 노력 끝에 우리집 식구가 된 복칠이. 복실복실한 털이 부드러워 한참을 만지게 되는 우리 복칠이는 방금 막 털 정리를 마치고 처음보다 한껏 귀여워진 얼굴로 책상 위에 누워있다.

며칠 사이에 꽤 많은 것을 샀다. 더 놀라운 것은 아직 오지 않은 정우들이 있다는 것. 하루에도 열 번씩 택배 조회 어플에 들어가 새로고침을 하며, 배송 중인 택배들이 하루빨리 배송 터미널에 도착하기를 바란다. 그렇게 애를 태우면서도, 그 기다림의 시간이 전혀 괴롭지 않다는 사실에 놀란다. 이미 닳을 대로 닳아버린 한 문장의 의미를 온몸으로 실감한다. 만약 오후 네 시에 네가 온다면, 나는 세 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 거야*. 내일은 또 어떤 모습의 정우가 올까. 나는 아주 오랜만에, 다가올 내일을 기대하며 잠든다.
*생택쥐페리, 어린 왕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