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927-언젠가 받았던 편지


이야기를 시작하자면 한도끝도 없지만 일단 클리셰니까 첫인상부터 이야기해볼까. 


널 처음 만났을 땐 밤이었고 나는 굉장히 들떠있었고 너는 나한테 무척이나 살갑게 맞장구를 쳐줬었지. 너는 내가 서울에 올라와서 새롭게 만난 사람중에 아직까지도 유일한 동향사람이야. 신기하지. 그래서 더 그런지 모르겠지만, 그날 느꼈던 그 동질감은 아직도 묘하게 선명해. 너는 처음 만난 날부터 몹시도 가까운 사람처럼 느껴졌고, 내가 그런 얘기를 하면 너는 웃으면서 받아줬지. 정말 옛날부터 알아온 친구처럼. 


그래서 내가 이것저것 챙겨주고 싶은 것도 많았는데 돌이켜보면 내가 하나도 해준 게 없는 것 같아. 말만 많았지 늘 받기만 했네. 오히려 네가 나를 늘 챙겨주고. 나는 해준 것도 없으면서 자꾸만 막 자랑스러운거야 얘가 내 친구라구 막 동네방네. 나한테 이렇게 잘난 친구가 있다면서. 너는 뭐든지 열심히 하고, 잘하고, 잘해내니까 그걸 지켜만 보고 있어도 흐뭇한 거 있지. 사실 내가 아는 것도 없는 주제에 몇개월 더 먼저 태어난 언니라고 그때 네가 우리동네까지 찾아와줬을 때 되게 꼰대같은 말투로 막 ㅋㅋㅋㅋㅋ그랬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부꾸로워서 쥐구멍에 들어가고 싶다. 제가 언니로 모시고 싶어요 언니. 사랑해요.


-갤러리를 정리하다가, 몇 년 전 B 언니가 해준 말을 발견했다. 네가 자랑스럽다고, 잘하고 있다고 하는 말을 아주 오래 들여다보았다.


180925


1. 8607님께

안녕하세요? 김창완입니다. 뼈가 드러나게 살이 빠지셨다니 제가 다 안쓰러운 기분이 듭니다. 근데 너무 예민하셔서 그런 것 같아요. 완벽주의거나. 


세상살이라는 게 그렇게 자로 잰 듯 떨어지지 않습니다. 좀 여유롭게 생각하세요. 제가 지금부터 동그라미를 여백이 되는대로 그려보겠습니다. (...) 마흔 일곱 개를 그렸군요. 이 가운데 v 표시한 두 개의 동그라미만 그럴 듯 합니다.


회사생활이란 것도 47일 근무 중에 이틀이 동그라면 동그란 것입니다. 너무 매일 매일에 집착하지 마십시요. 그렇다고 위에 그린 동그라미를 네모라고 하겠습니까 세모라고 하겠습니까? 그저 다 찌그러진 동그라미들입니다. 우리의 일상도~


20141204

창완


2. 광주에 가족들을 남겨두고 서울로 올라가는 길.

평소엔 웃으면서 떠나던 길이었는데, 이번엔 이상하게 눈물이 났다. 엄마를 끌어안고 결국 울어버렸다.


이제 막 시작한 사회 생활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어려웠다.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는데도 뭐라도 해보겠다고 달려나가야만 한다는 사실은 무서웠다. 내가 없는 동안에도 천천히 흘러가는 엄마 아빠의 시간을 내가 함께 할 수 없는 게 슬펐다.


“왜 울어?”

“출근하기 싫어”


거짓말은 아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180922


1. 출근한 지 한 달이 지나자, 욕이 늘었다.

인간에 대한 모든 기대도 버렸다. 사실 모든 인간은 좆같고, 나 역시 누군가에게 좆같은 인간이다. 내가 무슨 수를 쓰더라도 어디선가 누군가는 내 험담을 하겠지. 좋은 소리 들어보겠다고 시간과 정성을 쏟아봤자 정신병만 걸린다.


2. 대학원이 사실 학교의 모습을 한 직장인지라, 대학원 입학과 동시에 생활에 크고 작은 변화들이 생겼다. 그 중에 하나는 부모님으로부터 드디어 재정적으로 독립한 것. 용돈 받을 땐 몰랐는데, 월급이 들어온다는 게 참 좋은 일이더라. 월급이 들어왔다는 걸 처음 확인했을 땐 너무 기뻤다. 내 월급!! 5만원이지만 작고 귀여워...!! (물론 그 뒤로 장학금이 들어오긴 했다.)


가계부를 쓰고, 당장 다음달에 빠져나갈 적금 생활비 교통비 기타 등등을 생각하고 있는 내 모습이 퍽 낯설다. 뭔가 어른의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이제 내 일이 됐다. 


3. 책 읽는 시간과 글 쓰는 시간이 현저히 줄었다. 요즘은 일기도 통 못 쓰고 있다. 시간이 없는게 아니라 기력이 없다. 운동을 다시 시작해야겠다.


180906


“요새 좀 힘들어 보이는 것 같아.”


실험실 선배가 요즘의 나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는 걸 전해 들었다. 아닌 척 했지만 내심 놀랐다. 나 생각보다 투명한 사람이구나, 이렇게 마음이 다 티나다니. 농담으로 은근슬쩍 넘어가긴 했지만 마음이 좀 찝찝하다.


사실 힘들다. 실험이 힘든 게 아니라,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나다움을 잃지 않는 것에 에너지를 너무 많이 사용해서 힘들다. 누군가를 미워하거나 싫어하지 않고 언제나 한결같은 상태를 유지하는 것, 간단히 말해 ‘기분이 태도가 되지 않는 삶’을 위해 너무 많은 에너지를 쓰고 있다. 딱히 착한 사람이 되기를 강요받아서 이런 일에 에너지를 쓰고 있는 것은 아니다. 짧으면 2년 길게는 6년을 볼 사람들이다. 사이가 나빠지면 더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게 된다.


솔직히 피곤한 일이다. 그렇다고 이런 피곤함을 아예 피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나 역시 더불어 살아가는 의무를 피할 수 없으니까. 운동을 하면 처음 며칠 간은 너무 피곤하지만 점차 익숙해지는 것처럼, 이런 식의 에너지 소모도 시간이 좀 지나면 기초 대사량의 영역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물론 많은 시간이 필요하겠지.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다.


180904


어른스러워 보이고 싶어서 그런게 아니라 정말로 하루 종일 덤덤했다. 굳이 생일이라는 말을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서 그냥 조용히 하루를 보냈다. 초자를 정리하다가, 미팅 자료를 정리하고 데이터를 분석하다가 문득 앞으로의 생일은 모두 이렇게 흘러가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매년 9월 첫주에는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 같았다. 생일을 목 빠지게 기다리다가 생일이 되면 잔뜩 들뜨고, 또 그러다 5일 0시가 되면 바람 빠진 풍선처럼 급격히 쪼그라든 기분을 달래는 게 연례행사였다. 이제 그런 일이 더는 없을 거라고 생각하자 부쩍 어른이 된 것 같았다. 동시에 조금 서글프기도 했다. 사실 살면서 기념할 만큼 특별한 날은 많지 않은데, 그 몇 없는 날 중에 하나가 사라져버린 것 같아서.


그래도 바쁜 와중에 잊지 않고 생일을 챙겨준 사람들 덕분에, 이 특별한 날을 아주 잃어버리지는 않고 생일날의 기분을 충분히 만끽할 수 있었다. 문자와 전화로 축하해준 친구들-오랜만에 민기에게서 전화가 왔다-, 스물 여섯 해 동안 한 번도 거르지 않고 내 생일상을 차려주는 부모님, 그리고 생일의 시작과 끝을 함께 해준 짝꿍. 소중한 순간을 잊지 않고 함께해주는 이 사람들의 존재가 나에게 얼마나 소중한지, 또 얼마나 감사할 일인지 다시 한 번 깨닫게 됐다.


아무것도 아닌 보통의 날들처럼, 스물 다섯번째 생일이 이렇게 지나가고 있다.


180827


재앙이다.

많은 여자들이 "이런 나도 페미니스트라고 할 수 있을까?" 하고 자아검열을 할 때, 한 것도 없으면서 뻔뻔하게 자기 입으로 '페미니스트 대통령'이라고 나불댈 때부터 맘에 안 들었지만 그 이후의 행보가 더 절망적이다. 여자들이 동일 범죄 동일 처벌을 외치고 나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홍대 몰카남 가해자를 포토라인에 세우고, 징역을 선고하고, 안희정이 무죄가 되는 나라꼴이 우습다. 낙태죄 폐지 집회를 이어가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보건복지부에서 낙태를 불법 행위로 규정하는 안을 냈다는 것까지. 총체적 난국이다. '어디 계집애가 나 하는 일에 끼어들어! 내가 페미 해주겠다잖아!' 하고 발악하는 꼴이 역겹다. (분명히 이 글을 보고 '삼권분립도 모르냐' 하고 바들대는 열렬한 무뇌 추종자들 있겠지. 그런 것도 머리라고 달고 다닐 바에야 머리에 총 쏴서 자살해라)


오늘은 정부의 입맛에 맞지 않는 통계 결과를 냈다는 이유로 통계청장이 경질됐다. 그리고 그 자리에 '고학력 여성의 눈을 낮추기 위해 드라마 등을 통해 은밀하게' 작업을 해 출산율을 높여야 한다는 강신욱이 앉았다. 문재앙 정부의 거의 없다시피 한 업적 중에 하나였던 여성 고위 공직자 채용도 역시나 전시 행정이었다. 에휴 시팔 니들이 암만 그래봐라 내가 자위를 하고 말지 결혼하고 애를 낳나.


박근혜가 물러나고 세상이 좀 더 나아질 줄 알았는데, 오히려 더 숨통이 막힌다. 극과 극은 통한다더니 온 세상이 유신시절로 돌아가고 있다. 재앙이다. 모든 순간이 재앙이다.


180823


5월의 일기가 마지막이니, 여기에 글을 쓴 지도 벌써 세 달이 지났다. 새 술을 새 부대에 담고 싶어져서 또 리뉴얼을 했다. 일기장을 3개월에 한 번씩 바꾸는 버릇이 있는 나에게 티스토리란 얼마나 적절한 플랫폼인지.


고작 세 달 사이에 또 많은 일들이 있었다. 대학원에 합격해 마침내 졸업 예정자가 됐고, 선물로 풀프레임 카메라를 받았다. 긴 휴가를 받아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푹 쉬었는데,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몸과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이십대 초반 나를 거의 죽일 뻔 했던 병에서 벗어나자 학습 능력이나 집중력, 이해력 같은 것들이 월등히 좋아졌다. 이전의 나와 지금의 내가 전혀 다른 사람처럼 느껴질 정도다. 잃어버린 5년 때문에 같은 길을 걸으려는 사람들에 비해 꽤 뒤처져있지만, 괜찮다. 이제부터라도 달리면 된다. 살아있는 게 목표였던 시간은 이제 끝났다. 이제는 '잘' 사는 것을 목표로 해야지.


18.05.07


면접이 남긴 것은 약간의 안도감과 수많은 체지방들...

무튼 드디어 면접도 끝났고, 당분간 졸업과 관련된 서류처리 외에 크게 중요한 일이 없으므로 편한 마음으로 벼르던 것들을 해보려고 시동을 걸고 있다. 당장 내일은 벼르던 코토리 베이지 색 염색을 위해 탈색도 하고 염색도 할 예정. 이너컨츠 피어싱도 하고 싶었는데 아직은 좀 더 알아봐야 될 것 같아서 잠시 뒤로 미뤄두었다.


사람이 참 간사하다고 면접을 적당히 봤다고 생각하니 몸이 한없이 늘어진다. 면접이 끝나도 일주일에 한 편씩 논문도 읽고, 그동안 부족했던 유기 공부도 하고, 또 하루 30분씩 책도 꼬박꼬박 읽으려고 했으나, 막상 연휴가 되자 누워있는 거 좋아, 누워서 숨만 쉬어도 너무 재밌어, 하며 아무것도 안 하고 살았다. 목표가 없으면 내가 얼마나 늘어질 수 있는지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고나 할까...


이제 당분간은 러시아에서의 기억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지려 한다. 방학 땐 앞으로의 날들이 걱정돼서 그리고 3월과 4월은 면접 준비를 하느라 바빠서, 그 겨울의 기억이 아직 다 풀지 않은 짐처럼 마음 한구석에 뭉쳐있었다. 엄마와 함께 했던 러시아 여행은 나에게 여러 의미로 너무 소중했기 때문에, 이 소중하고 귀한 것들이 시간 앞에 그저 그런 기억으로 사라지게 둘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 중에 찍었던 사진이나 틈틈이 썼던 일기를 정리하다보면 개인출판을 고려해 볼 만한 원고가 나올 수도 있고, 그렇지 않더라도 나랑 엄마 둘이서 여행을 추억할 수 있는 결과물이 나오겠지. 목표는 7월 중순까지 뭔가 결과물을 내는 것.



+그나저나 5월 7일자로 푸틴이 또 대통령이 됐구나. 에르미타쥬에서 그림 보다가 러시아 대선 보이콧 시위 때문에 무장 경찰들 보고 놀랐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대선도 끝나고 푸틴이 또 대통령이 되다니. 시간 참 빠르구나 싶다. 사실 푸틴의 장기집권이나 푸틴을 향한 러시아인들의 광적인 열광이 어느정도 이해가 돼서, 이번 대선 결과가 납득이 된다. 나중에 또 여기에 대해서 이야기 할 일이 생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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