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9.24


어제는 하루종일 화학부 체육대회에 참여했다. 집에 돌아와 근육운동을 마저 한 뒤 씻고 깊은 잠을 잤다. 눈을 떴을 땐 이미 오후 한 시 반. 오늘 가야 했던 무기화학 보강은 끝나고도 남은 시간이었다.


당분간은 오늘같이 여유로운 날을 찾기 어렵겠다 싶어, 전에 스캔한 필름도 찾고 새 필름도 맡길 겸 사진관에 가기로 했다. 지하철을 세 번이나 환승해서 가기가 귀찮아 삼성역에서 내려 버스를 탔다.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반대편에 있는 코엑스가 눈에 들어왔다. 피아노 소리에 맞춰 치솟던 분수와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던 스무살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꼭 여기에 데려와야지, 하고 다짐하면서 누군가를 생각했던 기억도 함께 떠올랐다. 그 때 그 사람들과는 이제 연락도 잘 하지 않는다. 그들을 좋아하고 아꼈던 내 마음은 모두 어디로 간 것일까. 생각하니 씁쓸해졌다.


서울에 산 지 벌써 햇수로만 육 년이 됐다. 처음 서울에 올라왔을 땐 이곳은 영원히 타지일 것 같았고 나는 민들레 씨앗처럼 어디에도 뿌리 내리지 못 한 채 겉돌 것 같았는데, 서울 이곳저곳을 돌아다닐 때 문득문득 떠오르는 추억들이 많은 것을 보니 나도 모르는 새에 조금씩 이곳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사진을 맡기고 나와 잠실로 갔다. 버스 창 밖으로 보이는 익숙한 풍경들. 삼 년 전에 이 곳에서 과외를 했다. 과외를 갈 때마다 잠실의 대로변을 따라 걸으며 할머니에게 전화를 했다. 할머니 나야, 하면 할머니가 곧바로 내 이름을 불러주셨다. 할머니는 이미 그 때도 치매를 앓고 계셨기 때문에 기억하시는게 많지 않았다. 몇 번이나 반복해서 말씀 드려도 내가 대학에 갔다든가 하는 것들은 전화를 끊기도 전에 잊어버리셨지만, 그래도 전화를 걸 때마다 늘 내 이름만큼은 잊지 않고 불러주셨다. 다른 손자 손녀들과 사랑하던 딸들을 다 잊어도 나만큼은 절대 잊지 않으셨던 건 아마 그 통화들 덕분이겠지. 할머니의 목소리로 내 이름을 듣고 싶다. 그 목소리를 들으면 나는 또 울게 되겠지.


울적해진 마음을 달래려 커피와 케이크를 먹었다. 만 원이 넘는 사치였다. 창가 가까운 자리에 앉아 케익을 먹는 동안 마음 속에서 자꾸 두려움이 스물스물 올라왔다. 시간이 지나 독립한 뒤에도 내 기호를 지키며 살 수 있을까, 내가 돈을 벌 수나 있을까, 하는 것들. 내 취미나 음식에 대한 취향 같은 것들은 사실상 부모님의 경제력을 기반으로 갖게 된 것이다. 독립한 뒤 가난해져 결국 취향을 잃게 될지도 모르고, 심하면 독립 자체를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한이 들었다. 나는 이럴 때마다 사는 것이 무섭다. 하루는 죽는 게 무서워 울고, 또 하루는 사는 게 무서워 우울해하는 스스로가 우습지만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


이렇게 무섭고 슬픈 와중에도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큰 위안이 된다. 확실히 40대까진 취향을 잃고 되는 대로 살 지 몰라도 결국엔 잘 살게 될 거라고 위로해준 인생 선배, 우리 엄마의 이야기. 그리고 늘 우울하고 부정적인 생각 뿐인 내 옆에서 나를 억지로 바꾸려고 하지 않고 묵묵히 곁을 빌려주는 짝꿍의 존재. 여기에 내가 그동안 한껏 불안해하고 걱정했지만 번듯한 결과물이 된 사진들. 이 모든 것들이 더해지자 슬픈 마음이 조금은 사라졌다. 


아련하고 슬프고 두려웠지만, 그래도 결국 행복하게 마무리 된 어느 일요일.


MYOYOUN SK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