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4일에 관람했다.

 

막 내리기 전에 타임세일 티켓이 떴다길래 같은 실험실에서 인턴했던 친구랑 보러갔다. 사실 히스토리 보이즈도 그렇고 죽은 시인들의 사회도 그렇고 교육을 다룬 연극은 보는 사람의 마음을 좀 무겁게 하는 측면이 있는데, 둘 다 오히려 그런 관극 취향이라서 괜찮았다.

 

러시아 연극이니 러시아에 대해 잘 알고 있으면 당연히 더 재밌게 볼 수 있긴한데, 극본 해석이 잘 돼서 사실 크게 불편하거나 그런 건 없다. 학생들이 요구하는 에이플러스, 씨플러스 같은 점수들이 사실 5점(Отлично), 3점(Нормально)라는 것까지 굳이 알 필요는 없으니까. 하지만 학생들의 이름만큼은 보면서 좀 아쉬웠다. 사실 빠샤, 비쨔, 발로쟈, 랴랴 같은 건 정식 이름(?)이 아니다. 학생들의 이름은 사실 애칭이다. 원래 이름을 좀 줄여서 부르는 것으로 애칭과 원래 이름이 나름 일대일 대응을 한다. 각자의 원래 이름을 살펴보면 연극이 조금 더 재밌어진다. 비쨔는 빅토르(Виктор)의 애칭이다. 빅토르라는 이름이 victory와 같은 어원임을 생각해보면 연극에서 본 비쨔의 패배자적 모습과 이름이 다소 모순된다고 느낄 수 있다. 싸이코패스적인 인물(이자 나의 분노를 자극하여 물병을 던지고픈 충동까지 느끼게 했던) 발로쟈의 이름은 돌아온 러시아의 전제군주 푸틴과 같은 블라디미르다. 사실 이 작품은 1980년 초연이므로, 작가가 러시아 내에서 그다지 영향력 있는 인물이 아니었던 푸틴을 생각하고 발로쟈를 만들었다고 보긴 어렵다. 하지만 2017년 현재의 우리가 엘레나와 아이들을 좌지우지하는 작품 속의 발로쟈를 보면서 어떻게 푸틴을 연상하지 않을 수 있을까? 작품은 작가의 손을 떠난 뒤에도 여러 우연 혹은 필연에 의해 다양한 의미가 덧입혀진다는 것을 깨닫고 소름이 돋았다. 다시 이름 이야기로 돌아가서, 엘레나와 함께 극을 이끌어 갔던 또 한 명의 여성 캐릭터 랼랴 역시 애칭이다. 랼랴는 엘레나의 애칭이다. 같은 이름을 가진 두 여성은 서로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간다. 초라한 옷을 입고 하루하루를 그저 사는 것에 만족하는 엘레나와 화려한 것, 자긍심, 자존심이라는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랼랴의 대립은 소비에트 시대 내부의 변화를 가장 극명하게 나타낸다. (빠샤의 이름인 빠벨은 그다지 큰 의미를 담고 있지 않으므로 생략한다)

 

교육과 러시아 문학을 전공한 만큼 극에 쉽게 동화될 수 있었다. 특히 발로쟈의 대사 하나하나에 유난히 화가 나 물통을 던지고 싶다는 충동까지 일었는데, 아무래도 엘레나 선생님의 감정에 내가 동화됐던 것 같다. 그 정도로 몰입하며 관람했다. 연극을 보고 나온 뒤에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계속 생각하게 됐다. 기억하려고 애썼던 대사들이 몇 개 있었는데 아무래도 이 주 전에 본 연극을 이제서야 정리하다보니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남은 건 랼랴와 엘레나의 대립 뿐이다. 한 번 사는 인생 비굴하지 않게, 좀 더 여유있게 살자고 말하는 랼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다가도, 숭고한 이상과 아름다운 가치를 잊어선 안 된다고 말하는 엘레나의 이야기를 들으면 요즘 같은 YOLO 세상에서 내가 잊고 있었던 것은 무엇인지 다시 되새기게 된다. 한국에서 이렇게 러시아적인 연극을 볼 수 있었다는게 신기하기도 하고, 여하튼 여운이 긴 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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